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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거품 사태의 대표 사례, 남해회사 거품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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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지만, 사람들의 광기는 계산할 수가 없다"라는 말을 남긴 아이작 뉴턴. 물리학에서는 천재라고 평가받을 만큼 많은 업적과 발견을 남기 그도 투자에는 재능이 없었나 보다. 투자의 제왕인 워런 버핏도 투기에 관해 얘기할 때는 뉴턴의 말을 인용한다. 뉴턴이 투자했다가 대부분의 투자금을 날렸던 남해회사 South Sea Company 거품 사태에 대해 알아보았다. 

 

남해회사 거품 사태 발생하기 전의 시대적 배경

1700년대 초반이었던 당시의 영국 재정은 많이 불안정한 상태였다. 국내의 정치적 불안정, 외국과의 전쟁 등으로 영국은 큰 금액을 부채로 떠안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과제를 강화하고 한편으로는 국채를 발행해 재정을 안정화하려고 했다. 그렇다고 단시간에 해결될 문제는 아니어서 어려움은 계속 됐다. 그리고 화폐 정책에서도 문제는 불거져 나왔다. 은행에서 발행한 지폐를 활용해 재정 문제를 조절하고 경제 활동을 촉진하기 위해 잉글랜드 은행을 설립했는데 화폐 발행과 관리가 쉽지 않아 여러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은행의 업무에 정부와 긴밀한 관계가 유지되기 때문에 정치적인 간섭이 끊이지 않았는데, 정부의 정책 목표와 은행의 목표 사이에서 생길 충돌에 의해 화폐 정책의 일관성과 안정성이 흔들릴 가능성이 농후했다. 또 금리 상승과 금리 변동성이 미숙한 금리 조절 시도로 인해 오히려 더 불안한 경제 분위기를 만들었고, 예측 불가능한 금리 변동 상황은 이를 지속시켰다. 게다가 제일 큰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화폐 가치의 불안정성이었다. 지폐를 발행하는 것은 화폐 공급을 조절하여 화폐 발행량과 수요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인데 때에 따라 과도한 발행량으로 인플레이션 문제가, 때로는 부족한 화폐량으로 디플레이션 문제가 생기는 것이었다. 이것을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남해회사의 주가 그래프 이미지, 치솟았다가 폭락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남해회사의 주가 그래프

남해회사에서 시작된 거품 사태

해결해야 할 재정 악화라는 상황에 직면해 있던 18세기 초의 영국은 지출 중 상당한 액수의 채무상환이자를 내야 했고 만만치 않은 군사비 비중도 상당했다. 이를 해결하고자 회사를 설립하여 이미 부실한 상당량의 증권과 채권등을 그 회사의 주식으로 전환하여 국고를 지원하고 무역을 통해 생각 수익으로는 이자로 지출해 채무를 정리하는 곳으로 이용했는데, 바로 그 회사가 '남해회사'다. 정부를 재정적으로 돕기 위해 설립된 회사라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설립초기인 1711년에는 아프리카에서부터 노예를 스페인령이었던 서인도 제도까지 수송해 주고 그 이윤을 남기는 것을 주류 사업으로 구상했었다. 하지만 기대보다 무역량이 부족했고 밀무역으로 스페인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 외에도 바다에서 벌어지는 각종 재난 사고도 계속 발생했으며 1718년에는 스페인과의 전쟁까지 터지면서 무역길은 완전히 끊어졌다. 회사를 설립할 당시에 예측했던 거에 비해 너무 저조한 수익이 나자 다른 분야의 사업을 찾아보게 되었다. 1718년, 시범 사업으로 복권 채권을 발행해 기대보다 큰 성공을 거두면서 무역회사에서 금융회사로 사업분야를 전환하였다. 1719년에는 본격적으로 대량의 채권을 인수하는 대가로 액면가만큼 주식을 발행하는 권한을 얻었으며 수익을 만드는 구조를 만들었다. 남해회사에서는 주식과 국채 교환을 시가로 했다. 예를 들면 액면가 1파운드의 주가 1개가 시장가격이 2파운드인 경우 2파운드의 부채 1개와 남해회사 주식 1파운드 분을 등가교환 하는 것이다. 하지만 발행 허용 수량은 교환 금액(1파운드)에 따르기 때문에 액면가 2파운드만큼의 주식을 발행할 수 있었다. 즉 국채와 교환한 후에도 남해회사에는  교환한 수량만큼의 주식이 남는 것이었다. 이것을 계속 반복하면 남해 회사의 이익이 올라가면서 주가 상승을 이끌게 되는 것이다. 주가가 무한으로 상승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에 주식 보유자들은 순식간에 엄청난 수익이 생길 것이라고 예상하게 되었다.

넘쳐나는 투자금을 들고 투자처를 찾고 있던 중산층은 남해 회사의 주가 상승 소식에 주목하게 되었다. 남해 회사 주식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투자금을 싸들고 남해 회사로 찾아들었고 주식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도 투자를 하고자 달려들었다.  

사람들의 투기 열기를 타고 올라가는 남해 회사의 주가는 1720년 1월 개당 100파운드였다가 5월에는 700파운드, 6월에는 1,050 파운드로 치솟았다. 이 열풍은 은행과 영국 동인도 회사의 주가까지 영향을 미쳐 덩달아 투자 붐을 일게 만들었다. 

이를 우려한 정부에서 거품회사 규제법을 제정하면서 투자 열기는 식어갔다. 꺼지기 시작한 거품은 냉랭한 시장분위기에 급물살을 타며 사그라들기 시작했고 남해회사의 주가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너무 짧은 기간에 전 재산이 없어져 파산한 사람들이 넘쳐났고 일부는 자살하기도 했다. 남해회사 설립 초창기에 투자로 수익을 좀 만졌던 아이작 뉴턴은 주가가 급물살을 타고 오르기 시작할 때 거의 전재산을 재투자했지만 2만 파운드 정도의 손해를 봤다. 

남해회사 거품 사태의 결말은 미적지근하게 끝을 맺었다. 정부에서 나선 수사도 막대한 금액을 손해 본 투자자들의 분노를 달래주지 못했다. 어마어마한 사건임에도 이를 책임질 주요 인물이 없었으니 정치인과 왕실의 인물들까지 관여되어 조용히 사건을 무마하려 한다는 소문만 무성할 뿐이었다. 

 

남해회사 거품 사태를 마무리한 인물

1721년 남해회사 거품 사태의 처리 방침을 확정하고 난 후 경제는 서서히 회복기에 들어섰다. 정부의 입장을 변명해 주는 입장으로 재정 전문가 로버트 월폴이 사건을 마무리했다. 명쾌한 해결도 없는 애매한 설명으로 사건을 마무리했음에도 1742년까지 제1경제 수장으로 정권을 잡아 왕실의 인물이 관여되었다는 소문에 더욱 힘이 실렸다.

남해회사 거품 사태는 주식 시장에서의 투기와 주가 조작에 대한 경고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영국의 경제와 주식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친 남해 회사 주가 폭락은 이후 주식 시장의 안정성을 강화시키고 투자자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주식 시장 규제 및 투자 보호에 대한 관심과 중요성을 높였다. 이와 관련됐던 부분에 대해 조치가 강화되었으며 남해회사 사건 조사로 작성된 보고서 '브리지 상회의 장부에 대한 소견'은 세계 최초의 회계 감사 보고서로 인정받았으며 이 보고서를 기반으로 일반 대중에게 운영 자금을 모금하는 형태의 사업에서 회계 기록의 평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했다. 이를 근거로 공인회계사 제도와 회계감사 제도가 탄생하게 되었다.